나는 요즈음 만년에 있어서 필요한 네 가지를 허용(許容), 납득(納得), 단념(斷念) 그리고
회귀(回歸)라고 생각하게끔 되었다. 이 책의 각 항목은 부분적으로 이런 것들을 언급하고 있다.
즉 이 세상에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선과 악이 어떤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 허용이며,
내 자신에게 일어난 여러 가지 상황을 정성을 다해 의미를 부여하려는 것이 납득이다.
종교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신의 의지를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것에서 보고자 하는 노력이다.
갈망했으나 이루지 못했던 것은 어떠한 인간의 생애에도 있으며, 그때 집착하지 않고 슬그머니
물러날 수 있다면 오히려 여유 있고 온화한 인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단념이다.
그리고 회귀란 사후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 생각하는 것이다. 무(無)라도 좋으나 돌아갈 곳을
생각하지 않고 출발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 '계로록' 中
친정엄마가 없는 친정집. 이제는 동생네가 들어와 아버지를 보살펴 드리고 있다.
편안히 자주 들리던 곳이었건만, 이제는 매번 올케의 허락을 받고 조심스레 들렸다 불편하다는
느낌이 들만하면 자연스럽게 퇴장하는 타이밍을 계산한다.
그런데 요근래 갈때마다 주무시고 계셔서 아버지와 대화할 시간이 촉박할 정도로 적었다.
병마와 싸울 힘이 없으면 그렇게 많이 주무신다는데..
어제도 아버지는 주무시고 계셨고, 새로 산 이발기 핑계를 대며 기다리다 점심즈음에야 깨신
아버지를 뵙고 왔다. 치아는 모조리 빠지셨는데 먹는 맛도 모르시는 상태시다.
휄체어 없이는 문 밖도 나오지 못하신다. 이마져도 자력으론 힘드시다.
요근래 지난 앨범을 보시는 게 유일한 낙이라고 하시는 아버지.
아버지에게 견딜 힘은 추억밖에 없으신 게다. 잊고 있었던 아버지의 젊은 날이 내겐 슬프다.
요양사님이 이발을 해주시고, 나는 옆에서 물끄러미 아버지의 눈동자를 본다.
이발하셔서 시원하시겠다고, 새 장가 가셔도 좋겠다고 요양사분이 농을 건내자 고개를 돌리신다.
아버지는 아내가 먼저 세상을 등진 것이 당신에게 큰 벌을 내리신 것으로 생각하신다.
아버지는 뇌졸증이 오고나서야 깨달으신 것 같다.
아내를 보호하기는 커녕 아내의 도움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게 되면서 아버지는 최소한 당신이
세상을 떠났을때 부담이라도 줄이고 싶어서 상조회사에 아내몰래 돈을 불입하고 계셨다.
하지만 정작 그 불입금을 아내가 사용하게 된 것에 격한 슬픔을 느끼시는 것 같다.
"아버지, 하고 싶은거, 먹고 싶은거 말씀해주세요."
아버지의 대답은..소망은 어서 이 세상을 떠나 아내 곁으로 가고 싶다는 거라 하신다.
막내딸 앞에서 눈물을 흘리신다. 나는 목이 멘다.
왜 아버지는 젊은시절 그리 술에 집착하셨는가, 원망스럽다.
병을 앓고 나서야 희생하는 아내가 보이고, 세상에 울부짖었던 내 정의도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었음을 알게 되셨다. 그리고 당신이 낳은 자식들도 이기심의 충돌로 화합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납득해야 했다.
아버지의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덧글
2023/02/13 16:23 #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2023/02/18 09:52 #
비공개 답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