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 깨어있기(법륜스님) 포스팅과 함께 합니다.

우리는 원효의 삶을 통해 깨달음의 단계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그저 부귀영화만을 쫓는 세속적인 삶을 '화엄경'에서는 사법계라고 합니다.
드러난 현상을 실재라고 여기는 사바계, 현상계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이 모든 현상은
사실은 거품과 같고 그 드러나는 모습 이면에 본질의 세계가 있습니다.
이 본질의 세계를 이법계라고 합니다.
원효는 자신만 생각하지 않고 상대를 보는 순간 바로 존재의 본질을 깨쳤습니다.
그 동은 사법계에 살다가 이법계, 즉 진리의 세계로 옮겨갔어요.
그는 진리의 세계에 흠뻑 빠진 나머지 죽음도 불사하며 진리를 탐구했습니다.
그러다가 무덤에서 해골바가지의 물을 마시고 이사가 둘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깨끗하고 더러움이 둘이 아님을 깨쳤어요. 이것을 이사무애법계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 그 경계를 뛰어넘어 섰습니다. 현상 속에 걸림이 없는 현상이
그대로 실상임을 깨친 것이지요. 이것이 사사무애법계입니다.
첫 번째 세계를 다른 말로 하면 더러움에 물드는 존재들입니다. 이런 사람은
게으른 사람과 같이 있으면 더불어 게을러지고 욕하는 사람과 같이 있으면
욕을 따라 배우고 도둑질하는 사람과 같이 있으면 도둑질하고 싸우는 사람과
같이 있으면 싸우게 됩니다.
두 번째 세계는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마라'라는 말과 통합니다.
물들지 않으려고 이 더러운 세계를 멀리 떠나버리는 단계입니다. 그래서 담을
쌓고 깨끗한 세계에서만 노닐지요.
세 번째 세계는 더러움 가운데 있으면서도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것입니다.
진흙 속에서 피어나지만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의 세계입니다. 이런 사람은
담배 피우는 사람과 어울려 같이 있어도 담배를 피우지 않고 술 마시는 사람과
어울려 같이 있어도 술을 마시지 않고 거짓말을 하는 사람 속에 있어도
거짓말을 하지 않고 게으른 사람 속에 있어도 부지런합니다. 도무지 거기에
물들지 않습니다.
네 번째 세계는 걸레가 되어 더러움을 닦아내버립니다.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나를 더렵혀 상대를 깨끗이 해버리지요. 진흙 속에서 피어
나는 한 송이 연꽃이 아니라 그 한 송이 연꽃을 피우는 진흙이 되어버립니다.
이런 사람은 도둑질하는 사람, 거짓말하는 사람하고 어울려서 같이 도둑질도 하고
거짓말도 하며 다니는데 조금 있으면 그 친구들이 먼저 "야, 이제 도둑질 그만하자."
"야, 이제 거짓말 그만하자." 이렇게 되어버립니다.
실제로 원효는 도둑떼에 잡혀서 강제로 그들을 따라다닌 적이 있는데 한참
있다 보니 수백 명이나 되는 도둑들이 다 출가해서 스님이 되어버렸습니다.
이것이 사사무애법계입니다.
법륜스님은 삶 속에서 공부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깨달음이란 것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일어나는 곳마다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알아차리느냐 알아차리지 못하느냐에 따라 세세생생 육도를 윤회하며
헤맬 수도 있고 담박에 해탈할 수도 있다고 하신다.
책 속에 재미있는 비유가 있다.
성냥불을 그을 때 성냥을 세게 확 그어야 불이 일지 슬금슬금 300번
문질러보야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그런다고 불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300번이나 그었는데 불이 안 일어난다고 불만입니다.
옆에서 게 그어보라 해서 확 그었더니 301번째 불이 일었어요. 그러자 옆에서
10번째 긋고 있는 사람에게 301번 해야 불이 일어난다고 훈수까지 듭니다.
사실은 시간이나 횟수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공부를 이렇게 하면 안됩니다.
자기 의문이 들어야 해요. 참선하다가 개가 뼈다귀 씹는걸 보고도 저것이
불성이 있는지 크게 의문을 일으켜야 화두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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