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본 듯한 소설_파리의 아파트(기욤 뮈소) 책읽는 방(국외)






그 당시 숀 로렌츠가 전동차에 그린 그래피티들은 대개가 페넬로페의 아름다움, 쾌락, 관능에
대해 표현한 작품들이었다. 그 그림들은 마치 덩굴이 뻗어가듯 여러 전동차로 이어졌다.
그 모습이 마치 천상의여인 혹은 물의 요정처럼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나뭇잎, 장미꽃, 백합꾳
따위로 치장한 페넬로페의 얼굴은 변화무쌍하게 흩날이며 마구 뒤엉켜버린 아라베스크 문양의
머리카락에 둘러싸인 가운데 관능적이면서도 위협적인 느낌을 자아냈다.


본문 中




보통 소설을 영화화 했을때 실망하는 이유는 작가의 의도와 독자의 감상, 그리고 영화감독의 고집이
충돌하여 만족스런 결과가 나오기 쉽지 않다. 그래서 나는 소설이든 영화든 하나만 선택해서 비교없이
보라고 추천한다. 그게 서로에게 상처를 덜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끔 소설을 읽다가 내가 지금 소설을 읽고 있나, 영화를 보고 있나 착각할때가 있다. 작가가
묘사하는 글 속의 현장적인 분위기묘사가 나의 상상력이 필요없을 때가 그렇다.
이번에 읽은 '파리의 아파트'가 바로 좋은 예로 사건을 쫓는 현장감과 범인을 빨리 찾아야 하는 긴박감이
더해져 상상력을 동원할 틈도 없이 쭉쭉 책장을 넘겼던 것같다.
책에서 느낄수 있는 정적인 분위기보다 영화에서 즐기는 동적인 스피드가 글 속에서 더 강했다 할 수 있겠다.
아무튼 이번 소설도 범죄현장의 민낯을 하나씩 벗기는 재미와 함께 기욤뮈소 특유의 스토리 구성이 어우려져
만족스러웠다. 만약 영화로 나온다고해도 소설과 동일한 패턴으로 관람할 것 같다.

기욤 뮈소의 소설은 '7년 후'라는 소설을 읽은 기억이 있다. 당시 감상도 이번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스토리 전개와 함께 가장 근본적인 가족문제, 부모의 역할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우리가 사회적 명예와 부귀를 얻어도 가장 기본적인 만족, 즉 가족의 평화가 없다면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런 뜻에서 저자는 한 사람의 생애에 있어 가족의 문제를 다양한 각도로 소설이라는 문학을 통해 가장 극적으로
우리에게 전달하려 노력하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프랑스의 어느 아름다운 저택에 전산착오로 인해 전 강력계 형사였던 '매들린'과 유명한 희극작가 '가스파르'가
동시에 임대하게 되면서 이 소설(사건)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 집은 '숀 로렌츠(천재화가)'가 심장마비로 죽기 직전까지 살았던 곳이다.

'가스파르'는 '숀 로렌츠'와는 각별한 사이로 나온다. 그는 천재화가의 작품을 경매 내지 매수자에게 연결시켜주는
역할도 하고 있었고, 또 무엇보다 그의 아들 '줄리아'의 대부이기도 해서 천재화가의 죽음과 그의 아들 줄리아의
납치살인사건을 누구보다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가스파르'가 '숀 로렌츠'의 죽음에 감정이입되어 가슴아파하는 이유 중에는 어린시절 부모의 이혼과 함께
사랑하는 아버지와 생이별을 한 경험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유년시절 가스파르의 말실수로 아버지와의 밀회가 끊기고 종국엔 충격적인 아버지의 죽음까지 받아 드려야 했던
시간들은 '숀 로렌츠'가 심장마비로 죽을때까지 아들(줄리아)의 죽음을 부인하며 아들을 찾아나섰던 행동들과
연동되었다고 볼 수 있다.

만약, 영화라고 생각하고 본다면 투톱 주인공인 전임 강력계형사 '매들린'과 스토리 구성의 천재작가 '가스파르'
가 죽은 천재화가가 미쳐 풀지못한 미제사건을 푸는 활약상 쪽으로 촛점을 두었으리라 예상해 본다.
영화였으면 하는 기대는 천재화가 '숀 로렌츠'의 작품들이 어떻게 영상으로 표현되었을까 하는 점이다.
예를들어, 그가 구애하기 위해 전동차에 그렸다는 '페넬로페'의 그래피티는 글로 이해하기엔 부족함이
있기 때문이다. (위 인용문 참조)
빠른 전개로 책의 흡입력을 높이긴 하지만 거슬리는 부분도 몇몇 눈에 띄기도 한다.
예를 들어, 줄리안의 유치원에서 찾아낸 '숀 로렌츠'의 유작인 그림의 퍼즐을 주기위해 성냥갑에 남긴 낙서와
카페의 그림 속 큐알코드 속 별의 공통점들을 읽을때는 굳히 그렇게 복잡하게 엉켰어야 했나 싶었다.

소설의 결말은 영화처럼 끝맺는다. 그들의 끈질긴 추리와 추적 끝에 미제사건 속에 죽었던 '줄리아'를 찾고
죽은 아이의 부모 대신 투톱 주인공들이 부모가 되준다는 이야기다. 그 결말은 '가스파르'의 유년시절 아버지의
상처를 보듬어 줌과 동시에 인공수정이 필요없게된 '매들린'의 보답도 포함되어 있다.

이 소설을 통해 저자가 의도하는 바는 명확하다.
소설도 충분히 영화처럼 흥미롭고 재미있다는 것과 부모의 사랑이 자식에게 미치는 절대적 가치가 그것이다.
특히 아버지의 사랑은 요즘 모성에 비해 소외되어 제대로 부각되지 못한 현실에 대한 지적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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