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 있는 나날_가즈오 이시구로. 엄마가 뽑은 베스트셀러









"훌륭하고 숭고한 것을 저들이 어떤 식으로 이용하는지 당신 눈으로 똑똑히 보지 않았소, 스티븐슨?"
"죄송하지만 딱히 그렇다고는 말씀드릴 수 없군요."
(중략)
"죄송합니다만 도련님, 제가 볼 때 나리는 지극히 훌륭하고 숭고한 작업을 하고 계실 뿐입니다.
어쨌거나 유럽의 지속적인 평화를 위해 노력하고 계시는 것 아닙니까?"

"이봐요, 스티븐스. 내 말이 옳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정말 손톱만치도 들지 않소? 내가 하는 얘기에
일말의 '호기심'조차 못 느끼겠다는 거요?"
"죄송합니다만 도련님, 저는 나리의 훌륭한 판단을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말씀밖에 드릴 게 없습니다."


본문 中



2017년 노벨문학상 수삭작품인 '가즈오 이시구로'씨의 '남아 있는 나날'을 늦게나마 이 가을이 가기전에 읽어봤다.
가을에 읽어서 그런가. 저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를 파악한 독서의 말미에는 우울한 기분이 좀 오래갔다.
이 소설은 1989년 부커상까지 받은 작품으로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그만큼 문학적 가치가 확장성을 띤 작품이란 뜻이다.

소설은 한 평생 '달링턴 경'을 모시던 충직한 집사가 새롭게 달링턴 홀을 인수한 미국신사 '페러데이'로부터 일 주일간의
여행선물을 받게 되고, 그 여행을 통해 지난 날을 회고하는 글이다.
1인칭 소설답게 '스티븐슨'의 입장에서 바라본 집사생활의 시간들과 현재의 감정들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독자들은 주인공 스티븐슨이 누누히 강조하고 지키려 했던 '품위있는 집사'가 그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알게 되지만
반면 , '품위'라는 진정한 가치에 대한 고민도 함께 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그가 모셨던 달링턴 홀의 '달링턴 경'은 어떤 사람이고, 외부에서 그 곳을 바라보는 현실적 시선은 어땠을까.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 독일에서 히틀러가 세를 불리는 동안 영국의 '달링턴 홀'은 패전국 독일에 대한 동정을
이끌어 내는 정치의 장으로 기능을 발휘하게 된다. 외부에서는 그 달링턴 홀의 '달링턴 경'을 '영국 파시스트 연맹'의
조직들이 히틀러의 선거 책략의 한 도구로써 활용하면서 그 긴밀한 관계로 인해 반유대주의를 고수하는 곳으로 보고 있었다.
독일은 '달링턴 경'의 동정 넘치고 온유하며 순진한 심성의 신사라는 점을 이용한 것이다.

그렇다면 달링턴 경을 모시는 이 소설의 주인공 '스티븐슨'이란 집사는 어떤 사람인가.

부친에 이어 집사란 길로 대를 이은 그는 완벽하고 품위를 중요시 하는 일류급 집사들의 모임 '헤이스 소사이어티' 의
일원이란 점을 대단한 자부심으로 사는 인물로 나오며, 그 모임의 가치인 전문가적 실존을 유지하기 위해 사적인 감정은
일체 허용하지 않는다. 달링턴 홀은 찾은 손님들은 그의 흐트러짐 없는 완벽한 접대와 봉사를 받았을지 모르지만,
그는 주인에 대한 충성과 회합자리의 완성도를 위해 하나뿐인 부친의 임종도 지키지 못하고, 총무로 같이 일했던 사랑했던
'켄턴' 양 마져도 떠나 보낸다.

스티븐슨의 흠잡을 데 없이 지켜온 35년간의 헌신의 종말은 쓸쓸하기 그지없다.
유럽과 미국, 독일의 화합을 추진하려던 순진한 그의 주인 '달링턴 경'은 종전 후 '친나치주의자'로 몰려 폐인으로
죽게 되고, 충직한 집사 스티븐슨도 사회적 비난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

결국 그가 그토록 지향했던 품위있는 집사(헤이스 소사이어티)의 가치는 계급(일반집사의 상위 개념)과 편견이라는
관념에 묶인채 진정한 인간에 대한 고찰을 하지 못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그렇다면 주인의 어리석은 사태를 바로 잡을 기회는 없었던가. 그렇지 않다. 그동안 지켜왔던 위대한 집사라는 긍지를
주인을 향한 절대적인 믿음 뒤에 숨었을 뿐이다. (위 인용문 참조)
그리하여 그가 평생 지켜왔던 품위있는 집사의 가치의 하위 격인 '일괄 거래의 한 품목'으로 새로운 집주인에게
달링턴 홀과 함께 양도되는 처지가 된 것이다.

그는 과연 호의적이며 유머스레한 새주인이 선물한 서부지방의 여행으로 진정한 품위의 가치를 깨달았을까.
안타깝게도 그는 새주인의 농담과 유머기술을 발전시켜야 겠다는 각오로 소설은 끝을 맺는다.

소설을 읽고나면 사람이 일생동안 어디에 가치를 두고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만든다.
그것이 집사가 그렇게 지키고 싶어했던 '품위'라 해도 좋고 장인정신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명심해야 할 것은
그 어떤 가치도 인간의 상위 개념에 있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사람이 죽을 때 열심히 일하지 못해 아쉬웠고, 사회적으로 높은 직위를 이루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게 되서 아쉬워 하는
사람보다 사랑하는 가족과 조금더 함께 하지 못한 자신을 탓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생에 있어 진정한 최고의 가치는 인간에 대한 예의이며, 삶을 즐기지 못한 아쉬움만 있을 뿐이다.
한 곳에 정체되어, 한 곳만 바라보는 사람은 집사 스티븐슨과 같은 시대착오적인 오류를 범할 확률이 대단히 높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부조리하고 모순된 가치에 메달린 것도 모른 채 인생을 허비하며 살게 되는 것이다.

다시 소설로 돌아가서, 여행을 마치고 새주인을 맞이할 스티븐슨은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삶을 살게 될까.
소설에서 이어주지 못한 여행 후 늙은 집사의 삶을 나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싶다. 
 
그는 이번 여행에서 젊은 날 놓쳐버린 사랑의 소중함과 황혼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조금이나마 체험하고 돌아갔기 때문이다.
사람이 여행에서 얻는 것은 일상에서 미쳐 바라보지 못한 자신의 모습이라고 하지 않던가.

여행 마지막 날 만난 퇴임한 어느 늙은 집사의 말이 책장을 덮은 뒤에도 가슴에 오래 남는다.


"즐기며 살아야 합니다. 저녁은 하루 중에 가장 좋은 때요, 당신은 하루의 일을 끝냈어요.
이제는 다리를 쭉 뻗고 즐길 수 있어요. 내 생각은 그래요.
아니, 누구를 잡고 물어봐도 그렇게 말할 거요, 하루 중 가장 좋은 때는 저녁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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