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와 욕망의 결말_채식주의자(한 강) 책읽는 방(국내)









막을 수 없었을까. 두고두고 그녀는 의문했다.
그날 아버지의 손을 막을 수 없었을까. 영혜의 칼을 막을 수 없었을까.
남편이 피흘리는 영혜를 업고 병원까지 달려간 것을 막을 수 없었을까.
정신병원에서 돌아온 영혜를 제부가 냉정히 버린 것을 말릴 수 없었을까.

그리고 남편이 영혜에게 저지른 일을, 이제는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을,
값싼 추문이 되어버린 그 일을 돌이킬 수 없었을까.
그렇게 모든 것이-그녀를 둘러싼 모든 사람의 삶이 모래산처럼 허물어져버린 것을,
막을 수 없었을까.


- '나무 불꽃' 본문 中



미안하게도 한강씨 소설은 오랫만이다.
지난 5월에 맨부커 국제상(영국의 권위있는 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많이 놀랐고(우리나라 소설이?)
어서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즈음엔 이 책이 발간된지 9년이나 지났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마져 들었다.
그러다 지인의 선물로 손에 쥐게 되었다. 어느 새, 수상의 파급력이 지성인의 필독서가 된 것이다.

'채식주의자'를 읽고나니 딱 들었던 첫 번째 감상은 '하루키 문체'와 비슷하다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한강씨의 소설을 번역한 '데보라 스미스'씨의 번역이 자유롭게 빛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한국소설 특유의 억제된 표현과 문화 콘덴츠들이 말끔히 제거된 채로(이해하기 어려운 문장이 없는)
줄거리가 진행되었고, 단문장이지만 핵심만 간단히 표현하는 단어와 표현이 '하루키'답다랄까.
또한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오가며 독자에게 괴리감에 대해 적응케하는 능력도 묘한 공통점을 보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말하는 한국적인게 세계적인 것이라는 말은 억지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글로벌 독자들은 단순하고 핵심적인 표현에 상상력을 동원한다. 딱 한강씨 같은 문장 스타일이다.

연작소설 3부작으로 구성된 '채식주의자'는 세 명의 관찰자 시점에서 한 여성(영혜)의 인생이 지니는 관점을
서술한 소설이다. 한강씨는 각기 연재한 단편을 묶어 한 권의 소설로 완성시켰다고 고백했다.

첫 번째 '채식주의자'는 무미건조한 남편의 시선에서 바라본 영혜의 행동들이다. 자신이 평범하다고 느낀
남편은 평범한 여성을 결혼상대자로 선택해 결혼했고, 승진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대부분의 가장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영혜)가 갑자기 무서운 꿈타령을 하며 육식을 멀리하기에 이르른다. 결혼 전에 답답하다며
브래지어를 하지 않는 행동과 맞물려 그는 아내의 행동에 점점 기이함을 느낀다. 처가에 요청을 하지만 오히려
장인의 불호령과 아내의 강한 거부가 부딪쳐, 급기야 아내는 정신병원에 들어가게 된다.

두 번째 '몽고반점'에서는 영혜형부의 욕망을 다룬 이야기다. 영혜의 엉덩이에 아직도 몽고반점이 남아있을 거라는
아내(영혜언니)의 이야기에 그는 걷잡을 수 없는 욕망을 느낀다. 비디오아티스트인 그는 '인간과 짐승과 꽃을 교합'을
비디오에 담고 싶은게 꿈이다. 사라지지 않는 괴물의 얼굴이 계속해서 나타나는 꿈을 꾸는 영혜는 자신의 몸에
그려지는 나무에 해방감을 느끼고 형부와의 성교로 무서운 꿈에서 해방되지만 언니의 목격으로 형부는 구속되고
영혜는 다시금 정신병원에 감금되게 된다.

세 번째 '나무 불꽃'은 영혜언니의 시선이다. 두번 째로 정신병원에 갇힌 영혜는 이미 정신적인 복귀가 힘든 상태다.
스스로 자신의 몸이 나무가 되길 소망한다고 믿고 있다. 가족들이 모두 외면한 영혜의 병수발을 들면서 그녀는
어디서부터 잘못 되었는지 무척이나 힘들어 하면서도 동생을 책임지려 한다는 내용이다. (본문 인용 참조)


어른이 된 이후에 가족모임에서 유년시절이야기를 하다보면 같은 장면을 가지고 다른 기억을 하는 것을 발견하곤
하는데 그럴때마다 기억이란 참 상대적이란 생각이 들곤했다. 지난 그 기억 하나에도 각자 자신이 기억하는 것을
고집하고 상처받고 싶어하지 않는 것도 비슷하다.

어린시절 영혜의 다리를 문 개를 죽이는 장면(아버지가 오토바이에 매달고 달리다 죽인)은 괴물로 변해 성인이
된 영혜의 꿈에 반복해서 나타나게 된다. 유년시절의 강하고 무서웠던 기억은 어떤 형태로든 회귀된다.
그 기억은 아버지에게도 있을 것이고, 언니도 있을 테지만 영혜처럼 강렬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그녀의 유년시절 기억은 상처로 남아 잠재의식 속에서 분출되고 괴롭히게 된다.

나도 예전엔 가끔 힘들고 괴로웠던 유년시절 기억이 꿈으로 왜곡되어 나타난 적이 종종 있었다. 하지만 꿈에 대한
해석과 성찰의 시간을 가지자 더이상 꾸지 않았다. 내 생각에는 자신의 의지도 필요하지만 가족의 대화도 극복에
도움이 될 거라 믿는다. 영혜언니가 가족의 입장에서 '막을 수 없었을까?'하는 독백의 시간도 그런 의미에서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것이다.

가족이라는 최초의 집단에서부터 인간은 사회적인 도덕관념을 배우며 자란다. 그만큼 가족이라는 집단은
인격을 형성하는데 인생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다. 하지만 요즘은 걱정스러울 정도로 개인적인 판단만으로 결정을
서슴치 않는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이라면 생각하고 행동할 줄 안다는 점과 공동체생활을 한다는 점이다.
정신적인 착란증세와 개인적 욕망을 채운 인혜와 형부의 행동에 이해보다는 우울함과 답답함이 채워지는
것도 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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