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의 적합성_소소한 풍경(박범신) 책읽는 방(국내)






연애에서, 소유의 적합성이 자유라고 여길 때 최상의 열락(悅樂)을 얻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지속의 보장은 없다. 연애시절 우리의 문제는 피차 그 점을 몰랐다는 것.
그것이 지속 불가능한 꿈이라는 걸 안 것은 결혼 이후다.
고귀한 '소유의 적합성'을 결혼이 '비천한 지배에의 욕망'으로 조금씩 바꾸어놓았기 때문이다.




본문 中



학창시절 연극이나 혹은 시나리오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주인공이 아닌 주변인물로 서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때 나의 존재감은 없다. '여인1' 또는 '지나가는 행인2'.. '피해자 2'
이는 그저 나는 시나리오 속 하나의 풍경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미를 뜻한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일반적인 사랑을 그린 소설로 치부되는 것을 차단하고 시작한다.
철저히 방관적이길 바라고 유한적인 사랑의 사상에서 벗어나길 요구하고 있다.

'소소한 풍경'속에 나오는 인물들 구성이 그렇다.
예전 대학교수였고 현재는 소설구상 중인 스승인 '나'에게 제자 'ㄱ'이 느닷없이 연락이 와
'시멘트로 뜬 데스마스크'를 아느냐는 질문으로 이 소설은 시작된다.
ㄱ은 대학신입생시절 작가를 지망했고 습작 '우물'이라는 암호적인 표현으로 가득한 작문으로 스승의 눈에 밟힌 제자다.
ㄱ이 대학을 떠나 결혼을 실패하고 ㄴ과 ㄷ을 만났고 이어 ㄴ의 죽음으로 나타나는 풍경의 플롯을 스승은
소설의 모태로 삼을 것이다.

ㄱ은 결혼만이 오빠와 부모를 잃은 공백을 메워줄 것으로 믿었지만 실패한다.(인용문 참조)
그리하여 그녀는 부모가 없는..한때는 부모의 공간이었던 포도밭인 '소소'로 내려와 살고 있다.
그곳에서 더플백을 메고 온 ㄴ과 동거를 시작한다. 그리고 또 한 달 뒤 즈음엔 ㄷ과 셋이서 살게 된다.

ㄱ과 ㄴ..그리고 ㄷ 세명은 삶 속에서 결핍 덩어리들이다.
사랑하는.. 사랑해줬던.. 사랑을 받아야 했던 존재들인 가족들이 하나같이 그들 곁을 떠난 것이다.
떠났다는 강한 내재감은 슬픔을 넘어서 곧 나도 그 죽음을 받아드려야하는 운명처럼 그들을 다스리고 있었다고 본다.
그것은 선인장의 가시와도 같다.
내면의 가시는 상처받은 존재의 마음을 의미한다.
소설에서 ㄱ이 아버지의 선인장을 유품처럼 받아드리고 남자1의 결혼생활에서 남편과의 이질적인 소유욕을
방어처럼 받아드리는 대목이 그것을 표현한다.

그런 세 사람(ㄱ,ㄴ,ㄷ)의 동거(소유)의 표현은 육체적 결합차원에서 봤을때 '섹스'가 아니라 '덩어리'다.
사회가 규정짓는 혼인과 윤리적인 잣대에서는 분명히 비현실적인 작태로 치부되지만 그들의 언어에서는 덩어리인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죽은 존재들이 아니기에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다. 그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죽음'밖에 없다. 그래서 ㄴ이 우물을 파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직감한다.
우물이 완성되는 날이 바로 죽음의 그날이라고..
하지만 소설은 ㄴ의 죽음이후 ㄱ과 ㄴ은 멀쩡히(?) 삶의 풍경 속에 남겨진 채로 끝이난다.

나는 만약 ㄷ이 완벽한 한 덩어리를 위한 자살소동(연탄불 사건)이 실패로 돌아가지 않았다면 어땠을까..하는
아쉬움을 받기도 했다. 그래야만 이 몽한적이면서도 어색한 그들의 풍경이..그래..맞아.. 하나의 덩어리였어..
하고 나름대로 받아드렸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ㄱ과 ㄷ을 살도록 나둔다. 지독한 죽음의 상처를 또 하나 가시처럼 남겨준 채 말이다.

난 그래서 작가란 직업이 참 지독하다고..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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