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희가 읽은 박민규씨의 '근처' 책읽는 방(국내)



박민규 '더블' 독후감과 함께 합니다^^




중년 남성의 체념과 내면의 슬픔을 섬세하게 묘사한 박민규씨의 작품 '근처'를 용희가 읽고
독후감을 쓴 것을 우연히 컴퓨터에서 발견했습니다.
용희의 독후감을 읽으면서 나이답지 않은 사고와 고민을 옅본 것 같아 엄마로써 흐믓한 미소가 피어납니다.

'근처'는 한 중년 남성이 불치병으로 인해 갑작스럽게 죽음을 앞두게 되면서 맞이하는 삶의
변화를 조용히 박민규식 문장(독자들이 적응해야 하는..ㅋ)으로 다룬 작품입니다.

주인공 남자는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지만, 정작 그가 진정으로 원했던 삶을 살지는 못했고
얻으려 하지도 않았지요. 그는 스스로의 평가에서 '나의 근처를 배회한 인간일 뿐이다'라고 자책하고 있습니다.
'근처'는 소설내내 남자의 현실과 과거를 대비시키고, 회상을 통해 어렸을 적의 친구들과
어른이 된 자신과 친구들의 현실을 겹쳐보이고 있습니다.
남자의 체념은 유년시절 숙부의 집에 맡겨지면서 시작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이르러서야 자신의 삶에 대한 자각을 하게 되지만 그것은 체념으로 끝날 뿐입니다.
자기 스스로에 대한 조소와 회한, 체념인 것이지요.

제목으로 사용한 '근처'는 그런 의미에서 독자에게 많은 의미를 부여합니다.
이쯤에서 허락없이 용희의 독후감을 옮겨봅니다. ^^






박민규의 단편 ‘근처’를 읽고서


세마고등학교 1학년 6반 32번 최용희


여러 번 읽고, 다시 읽어서 가까스로 어느 정도의 갈피를 잡을 수 있었다.
아니 솔직히 다시 한 번 읽어야겠다.
건조하다 할 만큼 성실하고 바쁜 직장생활을 하다 뜻밖에 암 선고를 받고 퇴직한 마흔살의 독신 남자.
그는 퇴직한 뒤에 모북리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 진통제를 먹으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 뒤로부터 그의 회고와 사색이 줄곧 이어진다.
나는 읽는 내내 그의 사색의 배를 타고 침전하고, 완전히 가라앉아 갑판이 해면에 닿듯이 깨닫고,
다시 부유했다. 죽음 앞에서, 더없이 풍만해지는 그의 성찰은 활자 밑에서도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자신이 살아온 외로운 삶을 돌이키고, 인도천을 보며 삶은 죽음을 우려내기 위해 흐르는 물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는 모든 감정을 추스르고 나면 결국은 체념이라는 결론을 낸다. 갖은 희로애락이 발하고
다시 수축하는 감정은 그가 죽음 앞에 섰기에 느낄 수 있는 감정일 것이다.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른 채
바쁘게만 살아온 삶의 회의로 들끓던 감정이 있다. 또 얼마 남지 않은, 희소한 삶을 부둥켜안으며
오관으로 들어오는 온갖 감각을 흡수하려 하는 감정이 있다. 이 둘이 뒤섞이면서 캄캄하고 끝없이 깊고,
풍만한 체념에 이르는 것이다.

그 뒤로 그는 타임캡슐에서 회상했던 친구들과 동창회에서 만나 왁자지껄하게 술을 마신다.
푸근하고 파릇했던 과거에 취한다. 그리고 순임을 집 근처에 데려다 주고서 보여주려 했던 타임캡슐이
그제야 떠오르고, 나는 혼자가 된다. 다음날 타임캡슐을 다시 방에 내려놓으며, 되돌려 놓으며,
어젯밤의 모임이 아득한 옛날이 되고, 다시 각자의 삶을 산다. 그는 홀로, 아무에게도 밝히지 않은
자신의 병으로 ‘혼자’ 조용히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은, 그는 그토록 체념했음에도, 과음한 다음날의 숙취처럼
한층 증폭된 울림으로 그 자신에게 다그치듯 되묻게 한다.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대로 사라지면 그만일까? 그는 몸부림치며 갈구한다.
그는 다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바쁘게만 살아온 삶이, 찾아 나설 아내도 없이 홀로 시간을 보낸 자신이,
과거의 친구들과 만나 그 정겨움을 맛봤기에 더욱, 혼자 살았던 자신이 얼마나 무의미했던가를 깨닫는다.
그는 너무 뒤늦게 흔들림을 멈춘 나침반이 된다. 근처를 배회한 인간의 고독이, 한탄이 평생을 뚝 끊어내듯
쳐낸 단락에 멎어있다. 나도, 멎었다.

그리고 자주 순임이 찾아온다. 함께 점심을 먹고,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었고, 후에는 그 식당에서 망원경으로
별을 보고 사진을 찍는다. 카메라를 들이밀며 순임은 그에게 활짝 웃으라 하고, 그는 처음으로 그렇게 활짝 웃는
자신을 본다. 그리고 바짝 팔짱을 끼고 사진을 찍을 때 그는 순간 가정을 이룬 듯한 느낌을 받는다.
구원과 같은 그 순간으로 그는 치유의 꿈을 꾼다. 혼자가 아니기에, 그는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그는 하나도 슬프지 않았다.

그리고 친구들과 또 한 번의 모임을 가진다. 친구들은 어떻게 해서 순임과 그가 만나는 걸 알고,
순임도 그가 아는 옛날의 순임과 다르다는 말을 한다. 술맛이 더없이 쓰다.
그리고 이때, 타임캡슐 얘기가 나온다. 그가 꺼내 열어본 타임캡슐에는 나침반이 있었다.
그런데 친구도 그 타임캡슐을 꺼내 보았다고, 지금 아마 방 어딘가에 굴러다닐 거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가 나침반이 아니라 플루타아크 영웅전을 넣었다고 말한다. 친구들이 넣었다는 물건도
그가 보지 못했던 물건들이다. 그는 또 그의 친구는, 무엇을 열어본 것일까.
타임캡슐은 두 개인가. 환영인가. 알 수 없다.

그는 아주 아프고, 비가 왔다. 꿈을 꾼다. 어릴 적 친구들과 물장구를 치던 강물 속 그 어딘가에서
어린 아이들의 함성소리를 듣는 꿈이다. 순임이 간호를 하러 오고, 순임과 잔다.
작년에 멎었던 순임의 월경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리고 순임은, 돈을 빌려달라고 부탁한다.

그가 흔들림을 멈춘 나침반이 되고서, 고작 다섯 페이지 만에 위의 이야기가 전개되어 어리둥절했다.
그는 다시 부유하는가, 침전하는가?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소설 끝자락에서의 그를 골똘히 살피고,
또 살폈다. 그러나 그는 이렇다 할 것도 없이 한없이 절제되고 아래로 잠기어 있다.

하나 분명한 것이 있다면, 지금은 달라졌다는 것이다.
소설의 맨 처음 장면도 타임캡슐을 파내는 것이었고, 그를 깊은 회의 끝에 깨달음을 주었던 것 또한
초등학교 동창회이고, 그를 고독으로부터 구원한 것도 과거의 친구였다.

그러나 타임캡슐이 친구의 말과 일치하지 않을 때부터 자신을 깨닫게 한, 자신을 구원한, 그의 과거에
심한 흔들림과 균열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경로를 짚어서 그리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그것은 점차 표면으로 드러나, 순임은 그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한다.
어쩌면 그가 짐작했을, 과거와 지금은 분명 다를 것이라는 씁쓸한 예감이 실현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정겹기만 한 과거의 그녀가 아니라 순임도 현실을 사는 사람이란 것이다. 이런 모든 것들이 다시금
그를 휘청거리게 하고, 다시금 그를 체념하게 한다. 내가 이해가 닿는 부분은 여기까지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순임과 식당에서 찍은 사진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환하게 웃고 있는 낯선 얼굴을 보며
그는 생각한다. 그는 어디 있었을까. 그리고 그는 어디로 가는 걸까. 아마도 이 근처일 것이라고.
체념한 그의 눈빛에 비친 순간의 행복 한 장.

처음 읽었을 때의 나는 더 이상의 이해를 중도 포기한 체념의 낯빛을 하고 있었다.
이해한 지금에서야 소설 끝자락의 난해한 정글을 파헤치고 난 지친 마음으로 이렇게 독후감을 쓰며
겨우 어렴풋하게 그에게 공감한다. 아니 그와 대비된다. 실은 일종의 성취감을 맛보고 있다.
이제 저장을 하고 노트북을 종료한 다음 자리에서 일어나 뻐근한 허리를 우두둑 돌려줘야겠다.
점점 확신을 잃어가는 글쓰기 와중에도 하나 확실한 것이 있다면, 나는 살아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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