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 북로거] 복희씨는 친절할까요? '친절한 복희씨' 엄마가 뽑은 베스트셀러





나는 오랫동안 간직해온 죽음의 상자를 주머니에서 꺼내 검은 강을 향해 힘껏 던진다.
그 갑은 너무 작아서 허공에 어떤 선을 그었는지, 한강에 무슨 파문을 일으켰는지도 보이지 않는다.
그가 죽고 내가 죽는다 해도 이 세상엔 그ㅡ만한 흔적도 남기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나는 허공에서 치마 두른 한 여자가 한 남자의 깍짓동만 한 허리를 껴안고
일단 하늘 높이 비상해 찰나의 자유를 맛보고 나서 곧장 강물로 추락하는 환(幻)을,
인생 절정의 순간이 이러리라 싶게 터질 듯한 환희로 지켜본다.


-'친절한 복희씨' 본문 中



박완서할머니가 올 해 돌아가신 뒤, 책장에 꽂힌 그녀의 유작을 보게 되면
가슴으로 찬바람이 들어오는 것 같다. 그분이 이제는 같은 하늘에 있지 않는다는 사실과
그분의 진한 삶의 여운이 담긴 글을 더이상 못 본다는 확인 때문이다.

2001년부터 2006년까지 각 문예지를 통해 발표했고 수상했던 작품들을 모은 이 단편소설집은
한 번쯤은 어디선가 읽은 소설들이지만 이렇게 한 곳에서 다시 만나니 새롭기까지 하다.
소설을 끝내고 마지막 장에 박완서할머니의 마무리글을 읽으니, 이 소설집이 마지막 작품이 아님에도
마지막으로 쓴 작품인양 가슴이 먹먹하게 읽힌다. (아래 참조)


9년 만에 또 창작집을 내면서 또작가의 말을 쓰려니 할 말이 궁해던지 문득 이게 마지막 창작집이
될 것 같다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중략) 나도 사는 일에 어지간히 진력이 난 것 같다.
그러나 이 짓이라도 안 하면 이 지루한 일상을 어찌 견디랴.
웃을 일이 없어서 내가 나를 웃기려고 쓴 것들이 대부분이다.
나를 위로해준 것들이 독자들에게도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



'친절한 복희씨' 에 수록된 단편소설들은 박완서할머니가 그동안 써온 소설들의 하일라이트라는
생각마져 든다. 9편의 소설이 모두 삶에 대해 어느정도 연륜이 몸에 벤 여인네의 입장에서 써내려갔다는 점이
첫번째고 소설 속 그녀들의 삶이 우리네 한국여성을 대변한다는 점이 두 번째 이유다.
그것은 불편하지만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삶의 진실인 것이다.

9편의 소설이 다 각기 다른 소재와 다른 이야기인데 읽다보면 하나의 결론으로 치닫는 기분이 든다.
그리고 이제 세상에 없는 박완서할머니만의 삶의 해석이 이제야 보인다는 사실이 슬프게 다가온다.

'친절한 복희씨'는 9편의 소설 중에 가장 한국적인 여성의 삶을 보여주며 슬픔으로 농축된 소설이다.
'친절한 금자씨(영화)'가 결코 친절하지 않았듯이 패러디한 '복희씨' 역시 결코 착하지 않다.
하지만 남들이 보기엔 벌레 한 마리도 못잡고 전처 아이들까지 잘 길러 출가시킨 착하디 착한 여자다.

버스 차장이 꿈이었던 복희씨는 서울로 도망쳤다가 띠동갑 홀아비가 운영하는 가게에서 점원 겸 식모로
있다가 그만 꽃다운 열아홉 살에 그 남자에게 강제로 겁탈을 당하고 그의 하찮은 아내가 된다.
살의를 느끼는 삶을 살지만 그녀는 착한(?) 여자기 때문에 얼뜬 표정으로 살 수 있었다.

복희씨에게는 비밀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서울로 도망칠 때 훔쳐온 어머니의 아편이다.
조금씩 먹으면 비상약으로 쓸 수도 있지만, 많이 먹으면 아주 편히 죽을 수도 있다는 그 아편을 복희씨는
자신을 지키는 은장도처럼 품고 산다.

하지만 그녀는 오남매를 모두 결혼시켜 손자손녀까지 보았지만, 자유는커녕 중풍 걸린 남편을 돌봐야 하는
처지로 전락하고 중풍 걸려 흐느적대는 남편은 여전히 왕성한 성욕을 자랑한다.
일을 보고 뒤처리를 해줄 때마다 쾌감을 느끼는가 하면, 약사에게 비아그라를 달라고 떼 쓰는 남편을 보며
복희씨는 치욕감과 소름을 동시에 느낀다.

그녀는 큰 코 다친 것이다.
생철갑 속의 그 아편 덕에 삶을 지탱했다고 믿었는데 끝내 자신이 만든 올가미에 갇혀 버렸다.
그녀는 그의 생철갑을 한강에 버린다. (위 인용문) 아무런 흔적도 보이지 않는 검은 강으로..

그녀의 삶의 지탱목이었던 아편은 그녀의 지탱목이 아니었다. 그녀의 족쇄였던 것이다.
아편이 없었다면 그녀의 삶은 달라질 수 있었다. 그녀 스스로도 자신을 마음껏 드려냈을 것이고
사람들도 그녀를 누구인지 잘 알았을 것이다.

삶의 잔인함과 위선.. 그리고 불편하지만 받아드려야 하는 진실들을 알려주는 소설이었다.
여기에 수록된 9편의 소설 모두가 그랬다. 그녀의 아름다운 주름처럼 이 단편소설집은 삶의 부정적 양상에
대한 따끔한 충고가 담겨있다.

아..나도 박완서할머니처럼 멋있게 인생을 얘기하며 늙고 싶다.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파워북로거 지원 사업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덧글

  • 봄날 2011/10/17 22:50 # 답글

    보통 소설의 주인공들은 젊은 사람들인데 이 책에서 주인공들은 다 나이든 노년의 사람들 이어서
    더 인상깊었던 기억이 나요. 언젠가 고등학교때 읽은 것 같은데 왠지 모르게 충격이었어요. 아 나는 너무 희망차고 앞날에 대한 희망만 가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 땐 결코 내가 나이들고 늙을거란 상상을 못 하던 때였죠 ㅎㅎ
  • 김정수 2011/10/18 07:17 #

    ^^ 바로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이 삶에 대한 사고를 정립해 나가는 계기가 되는 거지요..박완서할머니는 등단도 늦게 하셨지만 가장 많은 사랑을 받으셨죠..노년문학의 선구자
  • 2011/10/18 17:49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김정수 2011/10/18 20:25 #

    안녕하세요.. 오랫만에 들리셨네요. ^^
    잊지않고 찾아주시고 추천책도 담아가신다니 너무 기분이 좋네요.
    건강관리 잘 하세요. 갑자기 추워집니다.
  • 이너플라잇 2011/10/18 23:44 # 답글

    문득 박완서님 글 속의 서술적자아가 생각났었는데 여기 복희씨가 등장하네요..삶의 불편한 진실을선택한 글쓰기는 대단한 비의같아요..실제 일상을 사는 공간에선 비의를 여과없이 드러내면 상처를 주겠지요~반어.역설.상징어법으로 살아가게 되는듯해요...
  • 김정수 2011/10/19 07:48 #

    네.. 특히 친절한 복희씨에서 그 느낌이 확연해져요.
    그 비밀을 알고 난뒤에 소름끼치는 박완서할머니의 비유에 감탄합니다.
    처음 읽을땐 '대체 이 내용이 뭐지?'하는 의문이 들거든요..
  • 간이역 2011/10/19 17:53 # 답글

    저도 박완서님의 소설과 에세이가 참 좋아요. 진짜 할머니가 자기가 살았던 이야기를 옛날 전래동화 이야기 해주덧 이야기 해주는 것 같아서 읽기 시작하면 빠져드는 것 같아요.
  • 김정수 2011/10/20 20:25 #

    현대인들과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노년의 깊이를 느끼게 해주신 분이었죠.
    박완서할머니 탄생 80주년 기념식도 하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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