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일리치의 죽음 / 톨스토이 책읽는 방(청소년,초등)



이반 일리치의 죽음/ 톨스토이.. 포스팅과 함께 합니다^^

공대에 들어간 용석이가 1학년 교양과목으로 선택한 '사고와표현' 과제로 '이반 일리치의 죽음' 에 대한
소감문을 적은 것을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트리백 했습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소감문
2010170111
최용석

주인공의 죽음을 그리는 경우 긴장감을 유지시키기 위해 다른 소설에서는 마지막까지 그 사실을 알 수 없거나,
심지어는 죽음을 밝히지 않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반면에 이 소설을 보면 다음 장을 빨리 보고 싶은 욕구 같은 것은
찾아 볼 수가 없다. 그저 독자는 예고된 죽음이 진행되는 과정과 주인공의 심적 변화를 묵묵히 바라 볼 뿐이다.
유머도 액션도 찾을 수 없는 이 책을 읽는 독자로서는 답답할 수 있는데, 이런 글이 써진 이유는 톨스토이가 살아오며
죽음을 마주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톨스토이는 자신의 삶 주변에서 수많은 죽음을 지켜봐야 했고,
그 자신도 죽을 날이 머지않았다는 공포에 싸여 있었다. 글이 밝게 써질 수 없는 배경과 태어난 이 글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즐거움이 아닌 소설의 진행 방식과 사실적인 묘사이다.

이 책의 장은 총 12개이다. 먼저 분량을 살펴보면, 1․2장이 소설 전체의 약 1/3을 차지하고 뒤로 갈수록 분량이 대체로
줄어드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설 분량이 짧을수록 더 시간의 흐름이 빠르게 느껴진다는 것을 볼 때, 뒤로 갈수록 더
긴박감 있게 진행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주인공이 보고 느끼는 점이 곧 소설의 내용인 만큼, 뒤로 갈수록 주인공이
생각하는 폭이 좁아지고 감지하는 것들이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먼저 1장에서는 주인공의 죽음과 주변 반응을,
2장에서는 이반 일리치가 병에 걸리기 전의 일생을 그린다. 이 부분에서 작가는 지인의 죽음 앞에서 냉정한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보여주며, 이반 일리치도 사실상 그런 사람들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를 묘사하는 과정은
9장~12장의 죽음에 대한 고뇌에 비하면, 고인의 집 의자가 불편하다는 것을 드러낼 정도로 느긋하다. 이후 병의 실마리와
증상들이 등장하면서 하루 동안 주인공의 시선과 사건들이 한정되기 시작하고, 이야기의 내용이 줄어들기 시작한다.

한편 7장과 8장에서 도중에 내용이 늘어나게 되는데, 이 두 장은 서로 대조되는 내용을 갖고 있다. 7장은 이반 일리치가
가장 믿고 의지했던 농부 게라심, 8장은 의사와 가족들이 보이는 기만과 거짓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둘은 이반 일리치가
생을 마감하기 전에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고 할 만한 부분들이다. 죽기 전까지 주인공이 가장 증오했던 것이
기만과 거짓이고, 이를 주인공에게 드러내지 않은 사람이 게라심이기 때문이다. 이후에는 비슷한 분량으로 빠르게 진행되며,
내용은 자신의 죽음에 대한 거부감과 고뇌 그리고 깨달음이다. 이 부분은 ‘검은 구멍’의 묘사나 피할 수 없는 ‘죽음’의 다가옴
등을 섬세하게 묘사하여, 주인공이 점차 죽어가는 모습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게 했다.

소설의 사실적인 묘사는 주인공의 생각과 주변 상황을 이해하고 공감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가장 먼저 든 느낌은 안도감이었다. 후에 ‘표트르 이바노비치’와 동일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는 것과, 톨스토이가
사람들의 심리를 얼마나 잘 맞추었는지를 생각해보니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이 당시의 이바노비치의 생각이 나의 생각과
별다른 차이점을 느끼지 못했었다. 평범하게 남들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으면서, 정상적인 가정을 꾸리며 살아가는 직장인은
곧 내가 바랐던 이상적인 생활임에도 그런 사람이 걸린 병은 나와 무관하다는 생각이 앞섰던 것이다.

주인공의 증오가 증가함에 따라 옷마저도 자신을 쥐어짜는 듯한 고통을 느끼는 것을 바라보며, 이 소설은 나와 무관한
일이라는 것을 암시해야 했고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다. 그의 일생이 평범하게 사는 다른 사람들과 별반 다른 것이 없었음에도
그런 고통을 겪어야 했다는 것과, 환자의 안부에 대해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사람이 게라심과 그의 아들밖에 없었다는 점이
더욱 동정심이 일게 했다. 그는 자신의 생각과 싸워야 했고, 다른 사람들의 이기적인 행동들을 참고 지켜봐야 했다.

판사의 직업에서 얻은 냉철한 이성은 자신의 일생이 잘못되었다고 인정하지 않았고, 그런 인생을 산 자신에게 이토록 큰
고통이 찾아오는 것은 부당한 일이라고 단정지었다. 이는 마치 죄가 없는 죄인을 심문하는 과정과 같아, 그의 고통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만 갔다. 고통이 심해지자 그는 ‘카이사르’에 관한 생각, 자신을 노려보는 죽음과 어느 쪽으로도 빠지지
못한 채로 걸린 ‘검은 구멍’에 대해 묘사하며 고통을 표현한다. 지인들의 태도는 이반 일리치의 증상을 악화시키는 역할을
소설의 거의 막바지까지 충실히 이행했다.

의사들은 환자의 증상이 얼마나 위독한지는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이 내린 병명이 맞는지를 더 중요시 했고,
가족들은 일리치의 죽음에 따른 결혼 축의금, 연금 걱정이 더 앞섰으며, 지인들은 치료가 안 될 것을 예상하면서도
다 나을 것이라는 거짓을 말했다. 결국 진심으로 이반 일리치를 걱정해 주었던 사람은 김나지움에 갔던 아들과 게라심 뿐이었다.

하지만 더욱 안타까운 점은 이반 일리치 자신도 남들을 이해하는 데 미숙했던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아내의 잔소리나
불평을 들으면 일에 집중하는 것으로 회피했고, 재산이 적은 편이 사람들과의 관계를 모두 끊어버린다. 의사가 이반 일리치를
진단할 때 그 방법이 자신의 그것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깨닫기는 하지만, 자신의 과거 행동을 반성하지는 않는다.

만약 그가 집에서만 생활해야 하는 아내를, 자신의 승진을 축하하러 와주었던 낮은 계층의 사람들을, 딸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해주었다면 장례식 때 온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의 행동은 자신의 발전만을 위한 것이었으며,
주변 사람이 도움을 받은 것은 부수적인 결과에 불과했다. 소설에서 그가 남들을 위해 한 유일한 일은 마지막에 가족의
슬픔을 덜기 위해 죽는 것이었고, 그 결정 이후 그는 빛을 보았다.

소설을 다 읽은 직후 무관심한 세태의 주역인 주변 사람들에 불만이 생겼지만, 알고 보니 사실 이반 일리치의 행동에도
문제가 있었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덧글

댓글 입력 영역



이 이글루를 링크한 사람 (화이트)

744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