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사라마구 / 돌뗏목.


인생은 하찮아 보이는 작은 에피소드들로 가득하다. 어떤 순간에 어떤 중요한 에피소드가
우리의 관심을 완전히 흡수하지만, 나중에 그 결과에 비추어 다시 평가해 보면 중요한
에피소드에 대한 기억은 희미해진 반면 하찮은 에피소드가 결정적으로 보이거나,
연속되는 의미 있는 사건들의 사슬에서 중요한 고리 역활을 하는 것을 확인하곤 한다.


..


될 일은 되는 거고, 그런 힘에는 도저히 버틸 수가 없는 거니까요.
인생은 사람이 태어난 때부터 시작하지 않는다. 만일 그렇다면, 하루하루가 새로 얻은 날일 것이다.
인생은 훨씬 뒤에 시작된다. 너무 늦게 시작되는 경우도 많은데,
시작하자마자 끝나 버리는 인생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리가 다 알다시피 형식을 통해 내용에 이르고, 껍질을 통해 알맹이에 이르고,
말의 소리를 통해 의미에 이르는 것이니까.
사물이 존재하려면 두 가지 필수적인 조건이 갖추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그것을 보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거기에 이름을 붙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인생의 굴곡과 운의 반전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에는 자기 자리가 있고 모든 자리는 자신에게
속한 것을 오게 해달라고 요구하지.
주기의 순환을 아직 배우지 못한 것은 사람뿐이다. 사람에게는 한번뿐 그 이상은 없다.
즉, 아무도 자신의 운명을 피할 수 없다는 이야기와는 달리 누구에게나 하나 이상의 운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른 사람의 운명이 우리에게 떨어지는 것도 언제나 가능한 일이다.

..


어쩌면 인간은 위로받을 수도 없고 위로받지도 않는 존재일지 모른다.
그러나 인간의 어떤 행동, 어느 모로 보나 무의미하다는 것 외에 다른 아무런 의미도 없는 행동을 보면,
인간이 언젠가는 인간의 어깨에 기대 울 것이라는 희망을 버릴 수가 없다.
이미 너무 늦었을 때일 수도 있고, 이제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때일 수도 있지만.



본문 中



알베레스 지역의 어느 산에 있는 크고 평평한 자연석인 탁자처럼 매끄러운 돌이 우연히 금이 가는 것으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결국 포루트갈과 스페인의 접경지역인 이베리아반도가 유럽에서 떨어져 나간다는
거대한 상상력을 모태로 하고 있다.
말그대로 초자연적인 현상에는 기이한 괴력과 체험을 바탕으로 등장하는 인물들이 있게 마련.

모든 것이 우연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흥미롭게 시작되는 이 소설은,
우연히 바닷가에서 돌을 던진 남자(조아킴 사사), 땅의 진동을 느끼는 남자(페드로 오르세),
찌르레기 수 백마리가 쫓아 다니는 남자(주제 아나이수), 또 우연히 떨어진 나뭇가지를 주워 땅에
금을 그은 여자(조아나 카르다), 푸르른 실로 그들과 연결된 여자(마리아 과바이라),
그리고 입에 푸른 실을 물고 길잡이 역활을 하는 개(콘스탄테)가 등장한다.

이제는(소설 속에서는) 섬이 되어버린 반도를 여행하면서 겪게되는 에피소드와 사회적, 국가적, 외교적
분쟁과 혼란, 그리고 그 속에서 벌어지는 이변들이 '주제 사라마구' 특유의 '연속적인 흐름(쉴 새없는 이야기)'
의 물결을 타고서 정신없이 지나가는데 잠깐 한 눈팔고 넘기다보면 어느새 새로운 인물과 환경이
바꿔져 있어 정신차리고 읽어야 하는 집중력을 요하는 작품이다.

100여년전만 해도 두 나라(스페인,포르투갈)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국방력과 경제력을 가진 나라였다.
당시 두 나라는 바다와 근접해 있어서 바다의 제왕이었다. 유럽에서 가장 강력했던 영국군함도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감당하지 못했을 만큼 중세시대에 스페인은 가장 막강했고, 주제 사라마구의 나라 '포르투갈'역시
당시 국방력과 경제력을 겸비한 굉장히 잘사는 나라였다.

그러나 집필 당시 포르투갈은 유럽의 변방인데다 경제력도 동구권 수준이었다.
'주제 사라마구'는 이 작품을 통해 당시 유럽통합을 앞둔 포르투갈의 현실을 걱정했고,
이베리아 반도가 분리된다는 환상적인 상상을 통해 포르투갈의 정체성을 찾아보고 싶었다고 생각이 들었다.
이베리아 반도가 분리된다니.. 정말 기발한 상상력의 대가 답다는 생각이 들지만,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현의 현상들에 대해 우리의 주인공들은 짐승(개-콘스탄테)의 본능의 인도를
받기로 결정한다.
속수무책인 현실은 지질학자들보다도 어쩌면 운명이라는 인도에 몸을 맡기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피레네 산맥이 갈라지고, 이베리아 반도가 유럽대륙으로 떨어져 나가 좌전을 하는(가속도가 붙기까지하는)
끝을 모르는 진행을 읽으면서 인간군상의 모습들이 하나씩 벗겨진다.
소설의 막바지까지 전혀 예측을 못하게 만들다 역시 저자는 기대를 저버리지않고 마지막에 기막힌 반전을 보여준다.
그는 포루투갈을 진정 사랑하는 국민이란 생각이 든다. 역사적으로 화려했던 위대한 시민임을 잊지말자는
것을 혼란 속에서 아둥거리는 가상의 현실을 비추어 줌으로써 역사의 주인공으로 다시금 도약하길
바라는 희망을 이 소설을 통해 보여줬다고 생각했다.

늘 그렇지만 그의 난해하고 복잡한 소설을 읽고나면 왠지 내 자신이 자랑스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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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수 | 2009/10/06 15:11 | 책읽는 방(국외)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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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뽀로로 at 2009/10/07 09:50
어웅.. 전 난해하고 복잡한 소설을 읽으면.. 더 스트레스던데;;;;;ㅋㅋㅋ
Commented by 김정수 at 2009/10/07 13:08
아니예요. 그정도로 복잡한 소설이.. ^^;;;

주제사라마구는 이야기체로 소설을 엮어가기 때문에 깔끔한 편집으로 익숙해져 있는 독자들이 조금
어려워하는 것 뿐이랍니다.
Commented by 간이역 at 2009/10/07 15:04
그래도 이런 소설이 읽고 싶은데 시간을 많이 따지는 게 제 한계인 듯해요.
언제 맘 먹고 읽어야지 이렇게 모진 마음 먹어야지 지켜질지는모르겠지만 말이죠. ^^;
Commented by 김정수 at 2009/10/07 21:15
처음부터 복잡(?)한 책을 읽는 것은 오히려 책에 대한 반감이 생긴다고 하더라고요.
처음엔 얇고 그림도 있는 만만한(?) 책부터 시작하는게 좋다고 합니다.
이 책은 조금 난이도가 있으니까 천천히 섭렵하시는게 좋을 듯 하기도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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