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아.



아니다. 바로 그 정신.
'그깟 사만원 때문에'라고 말하는 바로 그 정신 때문에 나는 세상에 속아넘어가는 것이다.
다른 자들의 밥이 되는 것이다.
누군가는 사만원 때문에 이 새벽부터 부지런히 사기를 치고 또 누군가는 그 사만원 때문에
해도 뜨기 전에 가게에 나와 알바를 족치는데, 오직 나만이, 이 한심한 이민수만이
'그깟 사만원 때문에 라고 태연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방값 이십구만원짜리 고시원에 살면서, 천원짜리 컵라면에 유통기한 지난 삼각김밥이나
먹는 주제에 말이다.

..


어떤 질문은 충분히 생각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달리 말하자면,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 퀴즈도 있다.
그러나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인생의 거의 모든 질문이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본문 中



지금 이십대들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기성세대들이 흔히 말하는 이십대는 제대로된 실력도 없으면서 자칭 고급인력이라 생각해
보상이 확실하지 않으면 실패가 두려워 시작조차 하지 않는 겁쟁이들이라 말하지 않을까.
아무튼 갈수록 청년실업률은 높아져만 간다.
다행히 부모님들이 계셔서 취업 군소리만 참으면 내쫓진 않으시니 다행이라고나 할까.

'퀴즈쇼'에 나오는 주인공 '이민수'는 어떤 인물인가.
정확한 내막은 밝히지 않았지만 아빠의 행방도 모르고 할머니(최여사로 칭한다)밑에서 자란다.
즉 사생아인 셈. 사치스런 할머니 밑에서 돈에 대한 정확한 감각도 없이(쓸 줄만 아는)
27살까지 편안히 살다가 최여사가 세상을 떠난 후, 빚더미에 연암동 집마져 털리고 완벽하게
빈 손으로 나오게 된다. 그러기까지 전혀 막힘 없는 진행과정을 읽으면서 돈이란 얼마나
철저히 무서운 존재인가를 깨닫는 데는 '이민수'나 독자나 할 말이 없게 만든다.

일확천금을 바라는 이십대는 아니지만, 돈에 대한 정직한 진실이 부족한 '이민수'는 우연히 인터넷
채팅방인 '퀴즈방'에 빠지게 되고 또 '지혜의 힘을 빌려 우연과 맞서는 인간의 운명을 시뮬레이션한다'는
'퀴즈쇼'란 집단에 깊숙히 빠져 합숙훈련까지 하게 된다.

이런 풍광이 과연 존재할까.. 나도 의야했지만 충분히 가상할 수 있는 소재란 생각이 들었다.

'퀴즈방'은 일종의 힌트를 주고 답을 찾아내는 '채팅방'이라고 할 수 있다.
퀴즈방에서 이민수는 퀴즈의 여왕 '벽속의 요정'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채팅은 글로 사랑에 빠지게 만든다. 특히 상대만이 알 수 있는 암호에 가까운 힌트를 주고 받으면
완벽히 비밀스런 밀어에 빠지기도 한다. 읽으면서 한동안 '채팅'을 소재로 영화가 흥행했던 기억이 새로웠다.

열거한 내용을 정리하면, 이민수는-이십대는 완벽한 정보의 바다, 네트워크세대에 살지만 정확한 정보와
삶의 진로가 오히려 불분명해 보인다. 이것이 진실같기도 하지만 또 저것이 진실같기도 하다.
그래서 헷갈리고 지치고 혼란스럽기까지 한 것이다. 그런 내용이 본문에도 나온다.


세상에는 되물을 것들 투성이였다. 어떤 세계에 들어가 그 일원이 된다는 것은 곧 그들이 하는 말을
알아듣게 된다는 뜻이었고, 무슨 말을 들어도 다시 되묻지 않게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대체로는 몰라서 되묻지만 알면서 되물을 때도 있다.
그것은 힘없는 어린 남자가 세상에 맞서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사보타주였다.



두께와 상관없이 속도감있게 읽었다. 하지만 뚜렷한 결론없이 소설은 끝난다.
마치 이십대의 결론같기도 했다.
화려한 도시의 네온사인에 서 있지만 정작 들어갈 곳은 없는 고독감이 전염된다.
그렇지만 마냥 추락하는 기분은 아니란 것이 즐거운 경험이었다.
이렇게 정확하게 이십대의 마음을 안 작가가 그동안 있었나..? 아마 없지 싶다.
그것만으로도 맑아지는 것이다.

난 김영하씨는 한국의 무라카미 하루키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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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수 | 2009/09/08 17:30 | 책읽는 방(국내) | 트랙백 | 덧글(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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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꾸자네 at 2009/09/08 22:04
저도 이 시간이라는 것이 가끔 답답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신경쓰고 싶지 않아도 이 시간이 계속 뒤에서 칼을 들고 제 등을 콕콕 찌르는 느낌이랄까..

시간으로부터 그리고 인생과 시간의 엮임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지만 쉽지만은 않은 것 같아요.

돈... 돈이라는 것도 참 요즘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것 같아요.
어떤 사람은 같은 시간 1만원을 벌고 어떤 사람은 같은 시간 일해서 5000원을 받는다는 생각을 하게되면.. 자신이 그렇게 초라해지지 않을 수가 없는 것 같아요.
그 사람은 같은 값으로 보면 저보다 30분의 시간이 더 주워지는 것이잖아요. 30분동안 그 사람은 휴식이나 취미도 선택할 수 있을테고.. 전 그만큼 선택의 폭이 줄어들고..

얻은 돈의 가치는 똑같다고 생각해도.. 이런 생각은 계속 머리 속에 맴도는 것 같아요. 그게 또 스트레스가 되곤하지요.. 하하..
많은 생각이 드는 글이었네요^^
Commented by 김정수 at 2009/09/10 23:04
게다가 시간당 임률을 따지는 회사라면 더욱 삶의 비애까지 느껴 씁쓸할테지요.
갈수록 고학력자는 느는데 사회가 최고 아니면 상대를 안해준다면 수많은 대학인력들은 어떻게 소화를 하려는지
대안이 안나와죠. 고성장과 실업율은 비례하는건지.. ㅡ.ㅡ;

젊은이들의 고독감. 그렇지만 크게 바라는게 없으니 버릴 것도 없는 요즘 세대들의 감정을 최소한
동감할 수 있는 귀한 시간이었다고 생각이 들었어요.
Commented by 꾸자네 at 2009/09/10 23:19
예전에 한 CEO가 방송에서 한 말이 생각나요.
어렴풋이 생각이 나는데요. 20세기가 수동적인 인력을 요구하는 사회라면, 21세기는 감성적이고 창의적인 인력을 요구하는 사회라는 말이었죠.
안타깝게도 요즘 위에서 인재를 발굴하는 분들의 관점은 20세기에 그 수동적인 인력인 고학력이라는 한 가지 잣대를 보고 인력을 선별하는 모습에 좀 안타까움이 많이 들어요.^^;
Commented by 이너플라잇 at 2009/09/09 14:24
김영하 씨는 단편에서도 빛이 나는데, 장편에서도 끝까지 흡인력을 잃지 않는 힘이 있는 작가인거 같아요.
게다가 그 색깔이며 주제가 마치 카멜레온같은 작가가 아닌가 싶어요..책마다 색다른 느낌.
이 책을 읽고 < 88만원 세대>도 읽게 되면서, 현재 20대, 10대의 미래에 대해 심각하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Commented by 김정수 at 2009/09/10 23:06
그래요. 김영하씨 독자층은 꽤 깊은 편이죠. 쉽게 읽히면서 사색하게 만드는 작가예요.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다양한 정신연령대를 소화시켜주고 이해해주는 젊은 작가분들이
많이 나왔으면..(아니, 이미 많죠..^^) 합니다. 한번 읽어보세요.
Commented by 혜광 at 2009/09/11 22:16
참으로
인생은 너무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지요.
비장이 상할만큼 많은 생각.....
Commented by 김정수 at 2009/09/15 22:04
후후.. 건강 유의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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