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여자의 이야기..리진. 엄마가 뽑은 베스트셀러





'리진'이 추었다는 '춘앵무'


나도 모르게 당신은 프랑스이고 나는 조선이라 여기는 마음이 내 안에 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당신이나 나나 우리는 남자와 여자였을 뿐이었는데.
길린.
나, 리진을 내려놓고 모쪼록 자유로우세요.
그래야 나도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당신을 만나지 못해도 이따금 당신의 후두염이 염려되겠지요.
당신도 나를 만나지 못해도 이따금 내 머리를 빗기고 싶겠지요.
이것으로 우리는 충분하다 여깁니다.

본문 中.


리진이 콜랭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를 읽을 즈음에 나는 사랑이란 이렇게도 표현될 수
있다는 것에 가슴아팠다.
그리고 스산한 가을처럼 슬픈 마음이 들었다.
모든 남자들에게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여인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리진은 온전한 사랑 하나 챙기지 못한 불행한 여인이었다고 생각이 들자 측은해 콧등이 시큰했다.

<리진李眞>이란 표제는 다름아닌, 리진이 프랑스 초대공사의 아내가 되어 조선을 떠날때 고종이
왕의 성을 따준 이름을 뜻한다. 김탁환씨의 소설 '리심'과는 동일인물이다.
이 소설은, 짧은 시대를 살다 간, 궁의 최고의 총애를 받았던 궁녀의 이야기다.
궁녀의 동선을 따라 소설을 읽다보면 2권인 것도 잊은채 파란만장히 새시대를 맞이했던
우리나라의 처절한 몸부림과 고통을 함께 하는 것을 느낀다.
한마디로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리진이란 여인은 한 번 들은 것이나 본 것은 스폰지처럼 빨아들인 총명한 아이로 나온다.
게다가 외모도 출중해 재색을 겸비한 보기드문 인물이었다 하니,
그 여인에게 빠지지 않을 남정네는 없었다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녀의 '춘앵무'를 보고 프랑스 공사인 '콜랭'이 반했고, 궁중악사로 길을 선택한 '강연'이 그랬고,
'고종'이 그랬고, 그녀를 친딸이상으로 아꼈던 '명성왕후'도 그랬다.
그리고 그녀를 마지막까지 철저히 다른 방법으로 악랄히 사랑한 '홍종우'도 그랬을 것이다.

이 소설은 가벼운 감상으로 덮기엔 무거운 소재를 다루고 있어서 읽는 내내 마음이 불편하다.
을미사변은 한민족이라면 역사적충격으로써 덮기 힘들기 때문이기도하고,
소설 속 '리진'은 명성왕후의 수족처럼 따르던 아이로 나오기 때문이다.
즉, 피와 살이 섞이지 않았지만 어미와 자식의 관계란 뜻.
명성왕후가 배를 긁어 먹이면서 이뻐했고, 리진 역시 프랑스대사관에서 왕비가 부르지 않을때
왕비의 의중을 간과하고 콜랭을 선택할 정도로 대화없이도 통하는 깊은 사이였다.
격동기에 왕비는 프랑스로 왕에게 허락을 받고 딸같은 리진을 보낸다.

현장을 본 사람만큼이나 사실감을 말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물론 소설이지만 리진을 통해 독자는 명성왕후의 괴로움을 느끼게 만들고, 리진의 아픔을 느끼게 만든다.
저자는 그당시의 기분을 시대적 상황을 아픔을 완벽히는 아니더라도 근접하게 알려줬다고 본다.

시대적 상황을 비춰봤을 때, 리진은 조선을 떠났어도 조선을 대표하는 여인이었다.
아무리 개화가 되었다고 겉으로 떠들어대도, 모파상이 정신병동의 초라한 죽음으로 마감된 것처럼..
명성왕후의 뛰어난 재략과 노력에도 처참한 죽음으로 결국 근대로 끌어내지 못했던 것처럼..
'리진'이란 이 소설은, 그 역사적 흐름은 결국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허망한 결론같은거 였을까.
리진의 죽음은 어쩌면 이렇게 소설 속에서나 존재가치를 인정해 주는 정도..

우리는 근거나 증빙이 없으면 믿지 못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하지만 사실이나 근거는 승자만이 남길 수 있다.
창피함을 무릅쓰고, 혹은 자신에게 불이익을 감내하고 솔직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 있을까.

사랑했던 콜랭 역시 왕비가 시해당했던 정황을 적은 편지를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찢어버린 것처럼.
모든 역사적 사실이라고 꺼낸 증거들은 어쩌면 완벽히 거짓일 수도 있다..라는 생각이 문득 인다.

우리 시대의 격력하고도 처참했지만 잊어선 안될 시기를 소설로 접근한 신경숙씨는
역시 그녀의 소설들답게 덤덤히 제 3자의 입장처럼 써내려간다.
그녀는 멍들도록 가슴을 뛰게 만드는 사랑 이야기이며,
분괴하게 만드는 만행들을 흥분하지 않고 논리적으로 써내려 가고 있다. 흥분할 필요도 없어요..라고 말하듯이.

읽으면서 이렇게 소설을 멋있게 쓰는 분이 같은 하늘에 산다는 것에 자부심마져 인다.
그리고 첫 역사소설같은데 전혀 어색함이 없었다.
아니 훌륭했다.







덧글

  • cavin 2008/10/26 19:00 # 답글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꼭 읽어봐야겠네요~
  • 김정수 2008/10/27 09:01 #

    cavin 님.. 감사합니다. 추천할 때가 제일 기분 좋더라구요? ^^
  • 페르소나 2008/10/26 19:30 # 삭제 답글

    저도 어제 이 책을 다 읽었답니다. 리진의 일생이 무너져 가는 조선의 일생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명성황후의 분신 같기도 했고요... 콜랭이 무책임하다는 생각도 들고....휴...왠지 모를 슬픔 같은게 오늘까지 지속되네요..^^;좋은 감상평 감사드려요~
  • 김정수 2008/10/27 09:01 #

    페르소나님.. 그러셨군요.. 신경숙씨의 진가를 다시금 알게된 책이었다고 생각이 들더군요.
    오랫동안 감동이 남는 책으로 자리매김할 듯..^^
  • 이너플라잇 2008/10/27 10:44 # 답글

    저는 이 책이 정말 아름다운 책이라고 생각했어요...
    4년동안 준비한 책 답게, 멋지고 성숙한 아픔이 묻어나는 거 같았어요..
    책 맨 앞의 거풀을 저는 간직하지 않는 편인데, 리진 만큼은 연두빛과 오렌지 빛깔 거풀을 소중히 입혀 간직하고 있답니다..
  • 김정수 2008/10/27 12:03 #

    맞아요. 정성껏 준비한 신경숙씨의 노력을 느껴서 그런지 표지 하나하나에도 정감이 가더라고요..
    오랫만에 좋은 책 읽은 기분이 들어요^^
  • 시골친척집 2008/10/27 14:09 # 삭제 답글

    같은 말이라도 멋지게 하는사람을 보면 참 부럽죠

    비록 책을 읽어보진 않았지만
    정수님의 설명만으로도 충분히 아픔과 슬픔이 밀려옵니다
  • 김정수 2008/10/27 15:30 #

    시골친척집님.. 신경숙씨는 현대적인 감각이 뛰어나신 분같아요.
    아픔을 덤덤히 표현하는데 그게 참.. 묘하게 더 아프게 전달되네요.
  • 쥐™ 2008/10/27 15:07 # 답글

    꼭 읽고 싶은 책 중에 하나인데, 보고 나면 너무 아플 거 같아서 아직 펴지 못하고 있어요...
    마음 굳게 먹고 펴 봐야겠네요..^^;;
  • 김정수 2008/10/27 15:31 #

    쥐™ 님.. 네.. 실은 저도 이 책 오래전부터 읽어야지 했었는데.. 이제야 용기(?)내서 읽은 거랍니다.
    저랑 비슷하신 기분이란걸 느끼게 되네요^^
  • 도령 2009/01/04 19:28 # 삭제 답글

    감상이라고 해야하나요, 정말로 잘쓰셨네요. 같은 책을 읽어본 사람인데도 어쩜 이렇게 다른지. 제가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김정수님께서 하나하나 찝어내주시는 것 같네요, 정말. 읽는 내내 신경숙작가님의 문체에도 감동하고 난 관심없는데- 이러고 살았던 사랑이야기도 가슴 먹먹했고 외면하고 싶던 가슴아픈 민족사에도 많이 울고 그랬네요. 읽는 내내 책속의 주인공이라도 된 냥, 동화되었었네요. 슬프구 안타깝구 그러면서도 책이 참ㅠㅠ혹시안읽어보신분들계신다면 추천해드리고싶네요.
댓글 입력 영역



이 이글루를 링크한 사람 (화이트)

745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