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권위, 내탕고 엄마의 산책길






1762년, 태양마져 그 빛을 감출 사건이 벌어졌다.
아버지 영조의 명으로 28세 젊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굶어 죽은 것이다.
영조 다음으로 왕위에 오른 정조의 첫 교지(敎指)는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였다.

그렇게 가슴에 담았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쏟아 낸 정조는
효심만큼이나 백성을 사랑한 임금이었다.
그는 사도세자를 기리는 모든 일에 백성의 세금인 국고를 손대지 않았다.
철저하게 왕의 개인 재산인 내탕고(內帑庫)를 사용했다.
아버지의 초라한 무덤을 화성으로 이장해 현륭원을 조성하고, 그 자리에 살던 백성들이
정착할 새집을 지어 주는 데도 내탕고를 썼다. 또한 흉년이 들 때면 내탕고를 풀어
주린 백성들을 구제했다.

조선의 임금 중 정조는 내탕고를 가장 긍정적으로 사용했다.
그런데 왜 왕은 개인 재산을 따로 가지고 있었을까?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함경도 땅의
3분의 1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거느리던 노비까지 합하면 재산이 어마어마했다.
이성계는 그 재산을 국고로 돌리지 않고 왕실 재산으로 상속시켰다.
그리고 고위 신하도 모르게 자신의 수족과 다름없는 환관들에게 재산을 관리하도록 했는데 이것이
훗날 내수사(內需司)가 되었다.

내탕고는 '밝음'과 '어두움'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내수사가 전국에 있는 왕의 토지와 노비를 관리하며 재산을 불리는 과정에 폐단이 생긴 것이다.
왕이라는 배경을 이용해 내수사는 왕의 토지에서 나오는 곡식으로 이자놀이를 했고,
국가만이 운영할 수 있는 염전의 운영권을 이용해 막대한 이윤을 남겼다.
그러다 보니 신하들은 끊임없이 내탕고를 돌리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하지만 왕도 사람인지라 총애하는 신하에게 선물을 하거나 왕자와 공중게도 용돈을 주고 싶을때가 있는 법.
무엇보다 왕실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어떤 임금도 내탕고를 없애지 않다가 마지막 임금인
고종에 이르러서야 겨우 내수사가 폐지되었다.

그러나 자연재해로 고통받는 백성을 구제하고, 이덕무와 같이 가난한 학자의 유고집을 편찬하고,
구한말에는 학교를 설립하고 독립운동 자금으로 쓰인 것이 내탕고였다.
절대 권력을 가졌던 조선의 왕도 백성을 위해서라면 개인 재산을 아끼지 않았다.
오늘날의 리더들도 되새겨 보아야 할 모습이 아닐까.


-좋은생각 11월 中




덧글

댓글 입력 영역



이 이글루를 링크한 사람 (화이트)

744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