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는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책읽는 방(국내)




子曰 : 道不遠人, 人之爲道而遠人, 不可以爲道.
자왈 : 도불원인, 인지위도이원인, 불가이위도

詩云: 伐柯伐柯, 其則不遠
시운: 벌가벌가, 기칙불원

<시경>에서 읊었다. "도끼를 잡고 쓸 도끼 자루를 베니, 만드는 본이 멀리 있지 않네."


도끼를 오래 사용하다 보면 자루가 헐거워질 수 있다. 당연히 자루를 바꿔야지 생각하게 된다.
도끼를 들고 산에 가서 적당한 나무를 벤다. 벤 나무를 가지치기하고서 비스듬하게 기울여서
쳐다보다가 '이게 아냐!'하며 내려놓는다. 비숫한 동작을 몇 차례 되풀이한다.
왜 이렇게 도끼 자루를 찾는 일이 쉽지 않을까? <중용>에서 이 이야기를 다시 사람 사이의
관계를 푸는 문제로 끌어간다.

(중략)

<중용>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나는 부모에게 자식이기도 하고 자식에게 부모이기도
하다. 따라서 내가 자식으로 부모에게 뭔가를 바란다면 그런 태도로 자식을 키우면 되고,
부모로서 자식에게 뭔가를 바란다면 그런 태도로 부모를 모시면 된다. 핵심은 내가 자식으로서
또는 부모로서 무엇을 바라느냐에 달려 있다. 내가 바라는 바가 분명하지 않으니 자식과 부모
에게 어찌해야 할 줄을 몰라 쩔쩔매게 된다.


- 본문 中




편리하고 불편한 점의 기준은 내가 사용하면서 느낀 경험이라는 것이다. 그 경험에 따라 나무를
찾으면 되는데 그러지 않고 나무만 쳐다보면서 자신의 도끼에 어울리는 재목만을 찾으니 쉽지가 않은 것이다.

중용에서는 도와 사람의 거리 역시 <도>를 실천하겠다고 생각하면 거리가 느껴진다고 느낄 것이라 말한다.
도의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특성은 과거에서 전승된 것이기 때문에 내가 공감할 수 있어야만 한다.
나의 것이 멀다고 한다면 그것은 내 것이라 할 수 없다. 따라서 도는 사람에게서 잠시라도 떨어질 수 없다.







덕수궁 봄데이트. 우리집 앨범방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은 덕수궁 무료개방일인거 알고 계셨나요?
벚꽃의 흐드러짐의 절정은 딱 일주일인데, 덕수궁 무료개방일에 맞추었다는 소식이 카톡으로 날라왔고,
망설임없이 아들의 퇴근시간에 맞춰 시청으로 달려나갔답니다.

발빠른 상춘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지만 문화시민답게 질서있게 간격을 띄우며 관람을 하더군요.
해가 길어져서 7시까지는 충분히 밝은 벚꽃을 즐길 수 있었답니다.
하늘도 베일듯이 맑고 미세먼지도 좋아서 모처럼 즐겁게 봄나들이를 한 것 같아요.

어느 안전요원분이 잔디에 올라가지 말라고 고장난 레코드처럼 열심히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저희는 그분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말했더니, 일하느라 바쁜데.. 하시면서도 즐겁게 찍어주셨습니다. ㅋㅋ
용희에게 다음엔 여자친구 만들어서 오라고 했더니 대답은 아주 씩씩하게 알겠다고 합니다.

시청까지 나온 엄마를 데리고 직장회식때 맛있게 먹었다는 양갈비외식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맛있는 것을 먹을때,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있을때 함께하고 싶어했다는 생각이 미치자 봄날처럼
마음이 참 따뜻해진 하루였습니다.






단테_신곡. 책읽는 방(청소년,초등)


들라크루아의 '단테의 조각배'





나를 거쳐 슬픔의 나라로 들어가거라.
나는 영겁의 고통으로 가는 문
나는 영원히 버림받은 자들에게로 가는 문

정의는 지존하신 창조주를 움직여
성스런 힘과 최상의 지혜, 그리고
태초의 사랑으로 나를 이루었도다.

나보다 먼저 창초된 것이란 영원한 것(천사)이외, 없었으니
나는 영원토록 남아 있으리라
여기 들어오는 너희는 온갖 희망을 버릴지어다.


지옥문 꼭대기에 걸려있는 글_ 본문 中



요즘 펜트하우스 드라마 열풍이다.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는 시청자들의 니즈를 반영해
드라마전개가 빠르고 반전이 많은 스토리라 시청률도 높은 것 같다. 드라마를 보면서 느끼는
건데, 등장인물들은 최고의 아파트(팬트하우스)에 살면서도 현실에 만족하기는 커녕 탐욕, 권력,
기만 등을 보이며 자신의 곶간에 더 많은 소유를 채우기 위해 서로를 못잡아 안달난 풍경을
그리고 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시청자들은 마치 현실판지옥을 상상할 것이다. 그리고
그 드라마를 보면서 '단테의 신곡'이 떠오르는 시청자들이 아마도 나처럼 많았을 것 같다.

줄거리는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 대략 알고 있었지만 정식으로 읽은게 아니었다. 문득 나는
들라크루아의 '단테의 조각배'란 명화도 생각나 다시 찾아 보았다. 이 명화는 들라크루아가
단테의 신곡을 읽고 영감을 받아 완성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명화를 보면 색체의 강렬하고 요동
치는 인물들의 사실성에 놀랍기 그지없다. 자세히 살펴보면 지옥의 저주받은 자들이 물 속에서
배에 올라타려 허우적거리는 모습에서 불안과 분노를 느끼게 만든다.
책을 읽고 다시금 보니 지옥의 도시인 '디스'로 가는 흙탕물을 건너는 모습이다. 배에 올라타려
절규하는 망령들은 생전에 거만하고 화를 잘냈다는 이유로 흙탕물 속에서 온몸이 찢기는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단테 신곡'의 줄거리는 간략하다.
부활절인 금요일을 하루 앞둔 목요일 밤, 어두운 숲 속에서 길을 잃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그의 앞에 오래전 사망한 존경하던 로마시인 '베르길리우스'가 나타난다. 베르길리우스는
단테의 앞길을 막고 있는 3마리(색욕, 식욕, 기만)를 야수를 피해 그를 구해주고 천국의 세계로
안내할 것을 약속한다.

'신곡'은 단테 자신이 지옥, 연옥, 천국을 차례로 겪으면서 구원을 받는 다는 내용이다.
로마시인 베르길리우스는 지옥과 연옥까지 길을 인도하지만 연옥의 꼭대기에서는 단테와
작별하게 된다. 그리스도이전의 인물이기에 갈 수 없다는 이유였는데, 연옥의 꼭대기에서는
단테의 영원한 여인 '베아트리체'와 지고천에 이르게되고, 그곳에서 신(神)의 모습을 우러러보며
삼위일체의 신비를 맛보며 천국으로 인도된다는 내용이다.

지옥, 연옥, 천국이 있다는 전재는 기독교의 바탕사상에서 비롯된다. 단테가 집필했던 당시는
종교와 도덕이 분리되지 않는 사회였다. 즉, 당시 신앙심은 곧 선이자 미덕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지옥의 존재는 기독교의 바탕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였고, 유일신체제에서 신을 믿지
않는 자나 이교도를 향한 강력한 메세지 중 하나는 지옥의 존재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런 사실로 책에서는 첫 번째 지옥의 단계에 호로메스,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등이
있었다. 그들은 인류의 성인이었지만 세례를 받지 못하였기에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는
이유로 무거운 형벌은 없지만 지옥의 1단계(림보)에 머무는 것이다.

'신곡'은 지옥의 묘사가 잔인하고 구체적이다. 지옥은 말그대로 입구에 써져있는 그대로
아무런 희망이 없는 곳이다. 지옥계는 제1옥에서 제9옥까지 있고 살아서 죄가 무거울수록
더 깊은 곳으로 떨어져 끔찍한 형벌을 받는다. 예상되는 죄목외에 혼음, 동성애는 물론이고
자살이나 자해행위를 한 자들도 무거운 지옥의 고통을 받고 있었다.
(제 7옥 인용문 아래 참조)

자신의 영혼을 제 손으로 잔인하게 제 몸에서 떠나보내게 되면 미노스는 그를 지옥의 제7옥으로
보냅니다. 그래서 결국 이 숲 속으로 떨어지게 되는데 자리가 정해진 것은 아니고, 다만 운명이
그를 몰아붙이는 곳에서 한 알의 밀알이 움트듯 살게 되는 것이지요. 여기에 새 순이 돋고
야생초로 자라나면 괴조 하르피아가 그 잎새를 쪼아먹으면서 그에게 고통을 안겨 주니 그 틈새로
고뇌를 뿜어내게 되는 것이라오. 남들처럼 우리도 육신의 부활을 기다려야 할 것이지만, 우리만은
우리 스스로 저버린 육신을 되찾을 수 없지요. 때문에 우리는 그 저주받은 육신을 여기에 끌고
와 그 몸으로 너나 할것없이 슬픈 고통의 숲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책은 지옥은 흡사 지구안의 핵(땅 속)으로 표현되고, 연옥은 땅 위에서 현세에 지은 죄를 속죄하는
풍경으로 묘사되고, 천국은 우주로 표현되고 있다. 연옥도 지옥처럼 몇 개의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자신의 죄를 깊이 통찰하고 수양하면 영혼의 구원을 받는다는 점에서 지옥과는 차별된다.

천국을 묘사하는 대목은 지극히 기독교적이며 일관된 우주의 찬란한 '빛'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것은 아마도 우주에 대한 인간의 열망이 반영된 것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웅장한 서사시와도 같은 단테의 신곡은 중세의 모든 철학과 전통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사후세계에 천국을 가기 위해 기독교를 믿는 사람도 있겠지만 적어도 종교에서 말하는 일곱가지
죄(교만, 질투, 태만, 분노, 탐식, 부정, 애욕)는 거리를 두는 것이 현명한 삶일 것이다.
우리가 드라마의 최종회에서 '권선징악'의 결말이 나지 않으면 분괴하는 것처럼 말이다.

다소 과장적이고 종교적인 책이다. 하지만 현재 우리가 몇세기 전의 책을 읽으면서 당시의
현실을 이해하고 지금의 삶과 비교하는 지혜를 얻으면 충분하다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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